□ 연혁

- 조선시대에는 여천군 화정면의 적금도를 포함 관할하다가 1897년에 산내면(山內面)과 산외면(山外面)으로 분활되었으나 1907년에 다시 점암면으로 통합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흥양군을 고흥군으로 바꾸면서 적금도를 여천군 화정면에 이관 하고 15개리를 관할하며 군조례(郡條例) 제155호에 의하여 1966. 12. 1설치된 양사 출장소가 15개리중의 금사(錦蛇), 양사(楊蛇), 남열(南悅), 우천(牛川) 등 4개리를 관할하여오다 1986. 4. 1 대통령령 제11814호에 의거 산내면으로 분면되었음.


본면의 금사리는 본래 조선시대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이곳에 종3품(從三品)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였고 사도진첨사는 회령포(會寧浦:장흥), 달량(達梁:영암), 여도(呂島:점암면 여호리), 마도(내발리), 돌산도(突山島:여천)의 7개수군만호진을 휘하에 두었다.


본면의 여호리(呂湖里) 또한 전라좌수영 사도진에 속한 여도진(呂島鎭)이 설치되어
이곳에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였다. 영조때의 점암면은 호수 1,172호에 인구는 4,512인으로남자 2,213인, 여자 2,299인이며 흥양현으로부터 30리라 하였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선생의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점암면이 흥양현 동쪽 20리에서 50리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 지역특성

- 점암면은 고흥군 16개 읍면중 면적이 가장 넓은 면으로 제일 적은 대서면보다는 갑절이 넘지만 군내에서 가장 높은 팔영산(八影山)이 웅립(雄立)하여 면의 대부분이 산지(山地)로 되어 있다.


  북쪽은 과역면과 접하며 서쪽은 두원면과 남쪽은 해창만간척지에 의하여 포두면과 이어지고 동쪽은여자만을 사이에 두고 여천군 화정면 적금도 및 남도와 마주 대한다. 북서쪽과 남쪽에 약간의 평야가 있으며 해창만(海倉灣)간척으로 농지가 늘어나고 있다. 면의 서쪽을 횡단하여 국도 15~27호선이통과하며 지방도가 연봉리(淵鳳里)의 국도에서 갈려 나와 포두면과 연결된다.


지질(地質)은 대부분이 중생대 백악기의 산성화산암으로 형성되어 있으나 북쪽 성기리(聖基里) 주위에화강암이 분포되어 있고 동쪽 일부만이 중성화산암지대이다.
간척사업으로 육지화된 섬이 많고 유인도7개와 무인도 7개가 있으며, 주민은 온순, 순박하다.


□ 전래전설


중국 진나라 시황제가 장생부사 하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라는 영을 내려 찾던 중 어느날 시황제가 세수를 하는데, 여덟 봉우리가 있는 산이 세수대야에 비추자 이산이 필경 령산이고 틀립없이 불로초가 이 산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 동남, 동여 각 500명을 시켜 찾도록하여 천신만고 끝에 한반도 남쪽에 있는 산을 찾아 황제에게 보고하였으며 이 때부터 팔영산의 "영"자가 신령"령(靈)"자가 아닌 황제의 세수물에 그림자가 비췄다고하여 그림자 "영(影)"자를 쓰고 있다고 전하고 있으며, 송팔응 장군이 젊어서 팔영산에서 무예를 기를 때 자기의 애마와 화살 중 누가 더 빠른가를 시험하기 위해 팔봉에서 화살을 지금의 점암저수지 방향으로 쏘은 후 백마를 채찍질하여 저수지 부근에 왔으나, 말이 화살보다 늦게 도착한 것으로 판단 말의 목을 칼로 치고 난 다음 화살이 도착하였다는 팔응봉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음.


□ 고장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


(조선시대)





- 김몽개(점암 용두) : 연일현감 역임.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공훈

- 김몽표(점암 용두) : 사복시주부 역임.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공훈

- 송홍열(점암 봉남) : 사헌부 감찰, 단성현감, 재주판관, 경상수군누후 역임.

- 송세발(점암 신안) : 임진왜란 때 우부장에 제수, 선무원종훈에 기록

- 김덕인(점암 오리) : 정유재난 참전 순절, 통훈대부중추부사 추증

- 송세즙(점암 신안) :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현내량 전과, 원종 2등 훈책록

- 송응경(점암 봉남) : 선조때 무과급제, 정유재란 때 사복시정으로 왜적격파,

                            원종2등 공신 책록

- 송 한(점암 서정) :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작전참모, 선무원 종훈책록

- 정영인(점암 용강) : 한성부 판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전사

                            선무원종훈에 책록, 금산대첩단에 배향


 


(해방이후)



- 류성갑(대룡리 203번지, 1910. 11. 11) : 제헌국회의원

- 이대순(신안리 427번지, 1933. 4. 18)

- 전라남도 교육감

- 제11, 12대 국회의원

- 민주정의당 원내총무

- 체신부장관

- 호남대 총장

- 백형조(장남리 777번지, 1936. 3. 28)

- 전라남도 경찰국장

- 전라남도지사

- 경찰청 상근위원


□ 유명산, 등산로, 낚시터


팔영산 : 해발 608m, 고흥군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정상에서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절경과 해창만 등 고흥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산으로 제1봉: 유영봉, 제2봉 : 성주봉, 제3봉 : 생황봉, 제4봉 : 사자봉, 제5봉 : 오노봉, 제6봉 : 두류봉, 제7봉 : 칠성봉, 제8봉 : 적취봉(일명 깃대봉)의 기암괴석으로이루어진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년중 수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음.
 

- 등산로 : 팔영산 등산로는 능가사 좌측 골짜기로 입산하여 제1봉에서 시작 8봉쪽에서 하산하는 약 3시간정도 소요되는 등산코스가 있어 1일 등산코스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등산로가 있어 주말이면 400~500여명의 등산객이 찾고 있음. 


- 낚시터


- 바다낚시 : 여자만


- 민물낚시 : 해창만, 강산담수호(12만평), 점암저수지(10만평)


□ 능 가 사


위치와 창건


    楞伽寺는 全羅南道 高興郡 占岩面 聖基里 평촌마을 369번지 일대 八影山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소속 사찰이다. 지형은 거의 평탄하며 건물은 남북종축선상에 들어서 있다. 건물의 배치는 현재 사찰 정문격인 天王門이 정면에 있고 100m 거리를 두고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뒤편 좌측으로 원음료(요사채)가 있고 그 뒤로 응진당이 있다.
 

    고흥은 조선시대에 興陽縣이라 불렀으며 팔영산은 때로 八顚山이라고도 하였다. 능가사를 품에 안은 팔영산은 제1봉 유영봉(儒影峰), 제2봉 성주봉(聖主峰), 제3봉 생황봉(笙篁峰), 제4봉 사자봉(獅子峰), 제5봉 오노봉(五老峰), 제6봉 두류봉(頭流峰), 제7봉 칠성봉(七星峰), 제8봉 적취봉(積翠峰)으로 우람하고 아기자기하게 다가온다.
 

    기록에는 417년 신라 눌지왕 때 阿度和尙이 창건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지역이 5세기에는 백제지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아도에 의한 창건설은 다소 문제가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나 그 이후의 남북국시대(신라통일기) 또는 고려시대에 고흥 지역에 능가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로서는 능가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능가사란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 중창하면서 새로 지은 寺名이며 그 이전에는 보현사였다.


    현존 건물은 대웅전(58.3평)과 응진당(19.7평), 사천왕문(22.3평), 원음료(요사채;23.2평) 등이 있으며 돌담으로 둘러진 寺域 면적은 3,217평이다.


□ 연 혁


- 이렇듯 창건 이후 연혁은 잘 알수 없지만 普賢寺라는 절은 훗날 능가사로 고쳐 불렀다고 하므로 조선전기에 이곳에 절이 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1530년 간행된『新增東國餘地勝覽』의「興陽縣 佛宇」조에 보현사는 佛盖寺와 함께 八顚山에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즉 16세기에 팔영산에는 능가사의 전신인 보현사라는 절이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능가사는 적어도 조선전기에는 팔영산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그 뒤의 연혁은 조선후기에 쓰여진 몇가지 기록이 전한다.

1712년(숙종 38)에 쓰여진「楞伽寺始創前後檀越綠序」와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吳遂采(1692~1759년)가 1762년(영조 2)에 지은 것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절의 중창에 관하여 기록해 놓은「全羅道興陽顯八影山楞伽寺事蹟碑」, 그리고 능가사에 속한 암자의 중수 기록인「八影山西佛庵重修記」와「萬景庵重修記」등이『朝鮮寺刹史料』에 실려있다.


- 이 가운데 절의 연혁에 관해 가장 자세하게 수록된 것은 吳遂采의「楞伽寺事蹟碑」이다. 이 비는 현재 절 경내에 전해지고 있는데, 비문에 의하면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절은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하여 소실 폐사가 되어 버렸다가 1644년(인조 22)에 碧川 正玄 대사가 중창하였다. 정현대사가 하안거 중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것은 한 신승이 나타나 "장부로 태어나 부처가 되기는 어려우니 역시 마땅히 대공 덕주가 되어 종풍을 弘布하겠다."는 말을 남긴 것이다. 이에 정현대사가 廣熙大師와 함께 산을 살피던 중 산 남쪽에서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과 요사체, 불상, 탱화, 종각 등 佛事를 일으켜 중창주가 되어 능가사를 始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꿈에서 취한 것이었다. 그 뒤 정현스님이 입멸하자 그의 제자인 敏煖·義軒·尙機스님 등이 스승의 유지를 붸아 일주문과 요사체 등을 세우고 단청 불사를 함으로써 절을 더욱 크고 새롭게 면모를 일신하였다. 일련의 寺刹 當宇 불사가 이루어지자 寺僧 遂明이 楞伽寺의 事蹟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천리를 달려 통정대부흥문관부제학지제교겸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吳遂采에게 글 지어 줄 것을 청하여 숙종 16년(1690)「楞伽寺事蹟碑」를 건립하였다.

  


- 그러니까 조선전기에 보현사라는 절이 팔영산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17세기 중엽에 벽천 스님이 중창하고 이름을 고쳐 능가사라 했던 것이다.


- 벽천에 의해 중창된 당우가 당시 모두 20여 동이 되었다고 하므로 절의 규모가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 당시의 전각 이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다른 기록을 통하여 일부 전각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懸辯 枕肱(1616~1684년) 스님의『침굉집』에 실려 있는「八嶺山楞伽寺大殿募綠文」을 통하여 法雲殿이 먼저 세워지고 이후 淸心寮와 屹靈寮가 만들어진 뒤에 다시 대전을 세우기 위하여 널리 시주는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性聰 栢庵(1631~1700년)스님의『백암집』에 실려 있는「八影山楞伽寺八相殿權綠疏」를 통해서도 17세기 후반에 팔상전을 세우기 위한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적비 음기에 기록된 인조 22년(1644)에서 숙종 14년(1688) 사이에 중창된 사찰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 殿堂 : 도원당, 대우전, 팔상전, 응진당, 영산전, 시왕전, 향로전, 영청당, 영당, 명부전, 향적전, 신영당, 능인전, 승당, 보현전, 흘영료, 원흥료, 어심전, 선당, 금화전, 법운전, 청하당, 문수전, 양진당, 공백료, 영흥료, 출세료, 관풍료, 송월료, 청심료, 도솔전, 묘적당, 태금전, 복련당, 부도전, 환희각

  


- 문루 : 일주문, 대루, 정문, 해탈문, 천왕문

   


- 암자 : 만경암, 비로암, 원각암, 중각암, 석문암, 수월암, 서부사암, 동부사암, 묘각암, 지장암


- 대가람의 면모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그 뒤 영조 44년(1768)과 철종 14년(1863) 중수하였다.
 

- 능가사가 始創된지 54년 뒤인 숙종 24년(1698) 범종 불사가 있었다. 한편 道安 月渚(1638~1715년) 스님의『월저당대사집』에「호남능가사염송설화수자발」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1,700개의 公案이 실린「拈頌說話」라는 책을 절에서 판각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불전 목판이 제작되어 佛經을 印出하기도 하였는데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97년『大藏一覽集』康熙三十六年歲次丁丑正月日全羅道八影山楞伽寺開板/ 고려대학교 소장, 1707년(숙종 33)『禪門拈頌說話』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刊/ 서울대학교 규장각(30권 10책), 1707년『禪門拈頌集』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板/ 개인소장이다. 그리고 도안의 제자인 雪巖 秋鵬(1651~1706년) 스님이 능가사의 수려한 경치를 읊은「題八影山楞伽寺」라는 시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절은 한 때 호남의 승경지로 이름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의 중창 이후 18세기 전반에는 불서를 판각 간행할 수 있을 만큼 절이 번성했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그러나 17세기의 중창 이후 절이 어떤 변천을 해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실학자 申景濬(1712~1781년)이 쓴『伽鹽考』에는 능가사가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1779년(정조 3)에 편찬된『梵宇攷』에는 '능가사와 中興寺는 八顚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단은 18세기 후반에 절은 이미 폐사가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이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輿地圖書』의 전라도 흥양 사찰조에 '능가사는 팔전산에 있으며 현의 동쪽 30리 이다.'라고 되어 있고, 이어서 '보현사·隱寂寺·佛盖寺는 지금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곧 능가사가 18세기 후반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의 실학자 李重煥(1690~1752년)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어디인가라는 관점에서 전국 각지의 정치, 경제, 풍속, 인심 등을 적은 인문지리서『擇里志』를 지었는데, 그 중의「卜居總論」가운데 山水條에서 특별히 능가사를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 내용을 보면, '능가사는 팔영산 아래에 있는데 옛날 琉球의 태자가 표류하여 와서 이 절 앞에서 관음보살에게 7일 밤낮을 기도하여 고국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더니 大士가 나타나 태자를 옆에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절의 스님이 그 형상을 벽에 그려 놓았는데 이중환 당시에도 그 그림이 그대로 있었다고 하였다.


- 그러니까 18세기 후반에 능가사는 폐사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관음신앙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는 셈이다. 능가사 소속 암자는 서불암과 만경암 등 11개 암자가 있었다고 사적비에 전하나 현존하는 암자는 없고 암자터로 추정되는 곳은 팔영산 주위에 여러 곳이 있다. 19세기의 상황은 西佛庵과 萬景庵중수기를 통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 서불암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옛날 보현사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능가사 별암 가운데 으뜸되는 암자로 원래 西不思義庵이었으며 서불암 혹은 서암으로 불려졌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에 닿아 있는 듯하였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조망이 좋아서 바다와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서불암은 능가사와 흥폐를 같이 했는데 개화기인 1889년(고종 17)에 雪巖이 중수한 바 있다. 또 암자 동쪽에 조금마한 전각을 지어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기도 했는데, 이는 雪巖의 弟子인 性眞이 申箕善(1851~1909년)에게 청해 지은「능가사서불암중수기」(1894년;고종 31)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만경암은 1903년 申昶模가 쓴『만경암중수기』에 의하면 417년(눌지왕 1)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安養寺와 龍門寺 두 절이 합해져 능가사가 되었고 옛날에는 普賢庵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암자도 인조 22년(1644) 圓覺寮·浮屠殿 등과 함께 正玄大師가 중창하였는데 이후 4차례 개수되었다. 철종 8년(1857) 先師 綺城堂이 更新하였다.

  



- 암자 당우가 1900년(庚子) 봄에 火災를 만났으나 見松, 瞑鶴이 廻向하였다. 3년이 지난 1902년(壬寅) 겨울 스님들과 신도들이 발원 모연하여 3년전에 있었던 재앙을 말끔히 복구하였다. 즉 院樓 殿房을 엮어 한꺼번에 專制를 열어 확장하였다고 한다.

1918년(戊午)에는 만경암을 중수하고 그 기념비를 대웅전 옆에 건립했다. 팔영산 제7봉 아래에 無用堂 秀演大師가 七峰庵을 지어서 수행했다는 기록이『無用堂集』에 전하고 암자터가 남아 있다. 益淳(道忍의 門徒)스님은 梵唄에 능하였는데, 그의 문도는 크게 성하여 널리 퍼졌다. 또한 碧梧와 그의 제자 설암, 儀觀, 炯然이 머물렀던 암자였다.

   


- 이처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부속 암자들이 중창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능가사의 명맥이 유지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최근에는 1990년대 초 法船 스님과 正行 스님 이후 종밀 주석하고 있으며 1993년 응진당 그리고 1995년 사천왕문을 각각 중수하였다.


□  능가사 관계 기문


절의 연혁 또는 불사 뒤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한 현판 檀越錄 등 절에 관계된 글이 여럿 전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절의 연혁을 살피는데 중요한 것이므로 그 목록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이 름
 지은이
 연 대
 위치와 출전
 
팔령산능가사대전모연문
 현변 침굉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팔령산지장암단청모연문
 현병 침굉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팔영산능가사팔상전권연소
 백암 성총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능가사염송설화수재발
 도안 월저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능가사시창전후단월록서
 慧 玄
 18세기 초
 조선사찰사료
 
능가사사적비
 오 수 채
 1726년(영종 2)
 능 가 사
 
팔영산서불암중수기
 신 기 선
 1894년(고종 31)
 조선사찰사료
 
만경암중수기
 신 창 모
 1903년(광무 7)
 조선사찰사료
 
만경암중수기기념비
 
 1918년
 능 가 사
 



□ 주요인물


- 영해 약탄 : 능가사에 주석한 여러 고승 가운데 대표적인 분으로 影海 若坦(1668~ 1754년)스님이 있다. 스님은 고흥군 粉川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통정대부 金中生이다.


1677년(숙종 3) 능가사에서 출가하여 得牛 長老의 제자가 되었고, 17세에 당대의 고승 無用 秀演(1654~1719년) 대사에게 가르침을 얻었다. 22세부터 불경을 배웠는데 28세 때 어머니가 죽자 '唯心'의 禪旨를 깨닫고는 고된 참선 정진을 시작했다고 한다. 1704년에 慈愛庵에서 많은 학승을 지도하였고, 송광사 등 호남의 여러 사찰에 머물면서 선교의 大匠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1726년에는 오수채의「全羅道興陽縣 八影山楞伽寺蹟碑」의 비음을 썼고, 1728년에는 송광사에 머물렀다. 1754년(영조 30) 제자인 楓巖 世察(1688~1767년)에게 법을 물려준 뒤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고, 부도는 능가사와 송광사에 세워졌다.


 

- 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고에도 박학했으며, 음양학과 수학에도 능통하였다 한다. 저서로는 문집 3권이 있었으나 지금은『영해대사문집』1권만이 전한다. 이 책에는 주로 詩句가 실려 있는데, 스님의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  능가사 유적유물


- 현재 능가사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원음료(요사채), 천왕문, 종각 등의 전각이 있다. 대웅전과 응진당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다.


 

- 종각 내의 범종은 1698년의 조성 시기에 뚜렷해 조선시대 중후기의 양식을 가늠하는 작품이며, 절 경내에 있는「楞伽寺事跡碑」는 절의 연혁에 관해 알 수 있어 중요하다. 이외에도 대웅전 앞에는 1918년 건립한「만경암중수기념비」가 있고, 경내외에 이곳에 주석하셨던 스님들의 부도 10기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 만든 공예품과 명문기와가 여러장 전해 오고 있다. 특히「王妃殿下壽齊年」과「世子邸下壽千秋」축원패는 매우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이는 목공예품이다.

용과 봉황, 구름, 연꽃무늬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왕가의 만수무강을 비는 정성이 깃들어 있다. 한쌍의 목조 업경대도 죄업을 비추어 주는 듯 둘레의 불꽃무늬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다. 막새와들은 당시 사찰의 규모와 중수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능가사에서는 불전목판을 제작하여 佛典을 印出 널리 보급하였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경전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697년『大藏一覽集』康熙三十六年歲次丁丑正月日全羅道八影山楞伽寺開板/ 고려대학교 소장, 1707년『禪門拈頌說話』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刊/ 서울대학교 규장각(30권 10책), 1707년『禪門拈頌集』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板 개인소장 등이다.



1. 대웅전(大雄殿) : 조선후기(17세 후반), 현재 국가보물 제1307호



- 대웅전은 18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북쪽을 향한 것이 특색이다. 약하게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를 올렸으며 공포는 내 4출목, 외 3출목의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다. 주간포는 御間 3구, 狹間 2구, 退間 1구씩 놓았다.

첨차는 교두형이며 쇠서는 앙성형으로 뾰족하게 처리하였다. 천장은 종량 위로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처마는 전후면 겹처마이다. 창호는 어칸은 四分閤 빗살문, 협칸은 쌍여닫이, 퇴칸은 외영닫이문으로 처리하였다. 뒷면에도 쌍여닫이문을 3곳에 뒤었다.


 

- 안에는 삼존불상과 보살상 2체와 후불탱황 3폭, 칠성탱화·제석천룡탱화·산신탱화 등이 있다.


 

- 불상은 높직한 수미단을 마련하여 봉안하였는데 재료는 목조이며 개금을 하였다. 삼존불 좌우로는 보살입상이 각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즉 삼존불은 관음·대세지보살이협시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에 두고 과거 연등불과 미래 미륵불이 좌우로 앉은 배치를 하고 있다.


 

- 중앙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에 조그마한 원형 육계가 보인다. 백호가 표현되었고 눈은 정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상호는 원만상이지만 조선시대 불상이 그러하듯 경직되어 있고 거의 무표정이다. 개금하면서 입과 턱 주위에 나선형의 수염을 표현하였다. 목에는 三道가 보이며 법의는 통견으로 어깨선을 타고 내려온 옷주름이 두껍게 처리되었으며 특히, 오른쪽 어깨를 타고 내려온 타원형의 옷주름은 조선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가슴은 양연형의 내의자락을 표현했고 그 아래로 띠 매듭을 둘렀다. 수인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하여 가볍게 무릎 위에 놓은 항마인을 결하였다. 무릎은 오른발이 위로 올라가는 길상좌이며, 하체 정면에서 흘러내린 의습의 옷주름이 유려하게 흘려내려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 왼쪽(향우) 여래상은 본존불과 비슷한 형식이지만 내의가 앙련형이 아닌 평행선으로 표현되었고,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구품인인 중품하생의 반대형을 결하고 있다. 오른쪽의 여래상(향좌)은 왼손을 들어 중품하생인을 결하고 있다.

한편, 협시 보살입상은 관음·대세지보살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예전의 보살입상을 도난당하고 새로 조성한 보살상이다. 예전의 보살입상은 3체불과 수인만 다를뿐 비슷한 양식이었다고 한다. 협시보살상은 모두 입상으로 보관을 쓰고 있었고 문수·보현보살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중앙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석가여래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중앙 본존부 좌우로 아미타의 중품하생인을 맺은 두여래가 있는 예는 해남 대흥사에도 있다.


 

- 불상의 조성 연대는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楞伽寺 大雄殿 釋迦牟尼佛像 服裝造 像記와 楞伽寺 大雄殿 釋迦牟尼佛像服裝記에 의해 1639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능가사 사적비』음기에 대웅전 불상 화주와 별좌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의 불상이 현존하는 불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비문에 따르면 대웅전화주는 광희 원일, 별좌는 종제 스님이다. 불상 화주는 혜영, 금화주는 신희 천일 一岑, 신개금겸 후불탱 화주는 聰演, 별좌 湛敬이다. 즉 불상을 조성하면서 개금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1630년대 목조불 양식을 살피는데 기본이 될만한 불상이다.(본존불 총고 184㎝, 두고 63㎝, 안고 38㎝, 안폭 38㎝, 견폭 80㎝, 무릎폭 120㎝, 무릎높이 28㎝, 좌우불 총고 107㎝, 보살상 총고 136㎝)


 

- 불화는 후불탱화와 제석천룡탱화가 1991년, 산신탱화는 1858년(철종 9), 칠성탱화는 1904년(광무 8)에 각각 조성되었다. 칠성탱화는 송광사 삼일암에 처음 봉안된 것이다.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는 사진 복사본인데, 원본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2. 응진당(應眞堂) : 조선후기(17세기 후반) 


-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막돌 주춧돌과 원통형 두리기둥 위에 외부로 2출목을 둔 3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5樑 형식이나 측면은 2高柱 5樑架로 꾸몄다.

천장은 종량 위로 우물천자을 가설하였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응진당은『능가사사적비』에 따르면 17세기 후반 중창 시에 함께 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로 중앙에 모시고 좌우로 16나한상을 배열하였다.


- 삼존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문수·보현보살 좌상과 아난·가섭 입상, 그리고 보살상·使者像 각 2체가 봉안되어 있다. 재료는 나무이며 개금을 하였다.

본존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발머리에 조그마한 육계가 보이며 계주도 표현하였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워 온화한 느낌을 주는 원만상이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내의는 연화형으로 표현해 법의와 구분하였고, 띠매듭을 둘렀다. 오른발이 왼쪽 무릎 위로 올라가는 길상좌로 결과무좌하였다. 수인은 향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무릎 밑으로 내려처지는 의습이 사실성을 띠고 있으나 너무 주름을 많이 주어 답답한 느낌이다.


   

- 보살상은 양식이 비슷한데 아직 피지 않은 연꽃을 양손에 맞바꿔 잡고 있다. 화염무늬가 표현된 보관, 법의는 통견,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띠매듭이나 연화형 내의자락 처리는 본존불과 유사하다. 이 삼존불은 어깨를 걸친 통견 衣文 등 그 양식이 대웅전에 봉안된 삼체불과 동일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은 국가의 길흉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깨와 흉부에서 땀을 흘리신다.(본존불 총고 110㎝, 두고 36㎝, 안고 20㎝, 견폭 55㎝, 무릎폭 70㎝, 무릎고 20㎝)


 

- 16나한상은 삼존불 좌우에 8구씩 모셔 놓았다. 이 불상 역시 아마 법당을 중창할 때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적비 음기에 '應眞堂 佛像十六羅漢化主 尙機 別座 萬幸'이라하여 삼존불과 16나한상을 조성한 화주와 별좌를 밝히고 있어 조성년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응진당 내의 16나한상이 바로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 없을 것 같다. 밝고 맑은 표정이며, 호랑이 등 산짐승과 날짐승을 아우르는 활달하고 힘찬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3. 천왕문(天王門;1666년) :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24


- 능가사 정문에 해당하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어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 협칸은 사천왕상을 모셨다. 막돌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는 외부로 2출목을 둔 공포를 올렸다. 아래쪽 쇠서의 형상이 강직하게 위로 뻗어 있어 특히 주목된다. 처마는 전·후면 홑처마이며, 양 박공면에는 風板을 달았다. 벽체는 심벽구조의 흙벽이나 중인방 아래로는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 사천왕상은 대웅전을 향하여 들어가는 오른쪽에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왼쪽에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지키고 있다.


 

- 동방 지국천왕상은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조식되었다. 얼굴은 사천왕 특유의 얼굴이 사납고 위엄있는 표정이다. 왼손으로 비파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현을 퉁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발 옆에 동자상이 있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그 뒤로는 화염문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는 별다른 지물없이 칼 끝을 잡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역시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들고 뻗쳐서 보주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용두화된 어류를 가볍게 쥐고 있다. 허리띠 앞으로 귀면상이 조각되어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보관을 쓰고 역시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조식되어 있다. 왼손은 어깨 위로 올렸으나 별다른 지물은 보이지 않고 오른손에는 긴 창을 잡고 있다.


    天王門과 사천왕상은 上樑文을 통해 1666년 중창 후 1824년과 1936년, 1995년 증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능가사사적비』의 음기에 '天王門化主 是閑 別座 懷盆 王像化主 天日 沖印 三輦化主 智雄'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 참여한 화주와 별좌, 천왕문을 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성에 대한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사천왕상으로 최명희의 장편소설『혼불』에도 등장한다.(높이 약270㎝)


 

4. 강희명 동종(康熙銘 銅鍾) : 숙종 24년(1698년), 유형문화재 제69호


    대웅전 안에 있었던 것을 최근 종각을 지어 밖으로 나왔다. 종신 유곽사이 문호형 장식안에 '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 八影山楞伽寺...'의 銘文이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龍婸는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을 두지 않고 조그마한 圓形孔으로 대신하고 있다. 용 주위에는 주조를 위한 구멍이 있다. 천판은 이중의 연화문을 彫飾하였는바 상단은 16엽 연화문이고 하단은 입상화문이다. 그 밑으로 몸통 위쪽(상대)에 원형으로 자리를 마련해 12자의 梵字文을 차례로 돌렸다.

인동문을 장식한 乳郭(27×34㎝) 안에 9개의 유두를 뚜렷하게 조출하였다. 4곳의 유곽 사이에는 천의를 걸치고 합장하고 있는 보살입상과 門戶形 장식 안에 '主上殿下壽萬歲'라는 문구가 양각되어 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주역』에 나오는 전양인 乾(≡)에서 전음인 坤(≡≡)에 이르기까지 八卦를 양각으로 두르고 있는데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이러한 예는 경내에 있는 능가사 사적비 귀부에도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8괘 아래의 명문을 통하여 주조 연대와 중창주 벽천 정현대사의 이름도 볼 수 있다. 하대에는 두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꽃잎과 당초무늬를 돌렸다. 특히 꽃잎은 각각 그 문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정교감을 엿볼 수 있다. 종신 중앙의 주종명은 음각인데 이에 따르면 施主秩은 통정 상운 등 68인이며 공장, 조역, 연화질, 별좌, 도감·삼강 등을 밝히고 있다. 당시 주지는 道學이다. 한편『능가사 사적비』음기에 '金鐘化主雙海 重鑄別座順侃 都監前僧統義軒'라는 기록이 있다. (총고 157㎝, 종신고 117㎝, 구경 101㎝, 종신 두께 9㎝)


 

5. 사적비(事蹟碑) : 조선 숙정 16년(1690년), 유형문화재 제70호


    능가사 경내의 응진당 뒤편 남쪽에 있다. 방형에 가까운 자연석 좌대 위에 귀부를 올리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비신 전면 상단에 篆書體 횡서로 '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라고 쓰여져 있고, 碑銘은 '朝鮮國全羅道興陽縣 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竝序'라고 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 63자인데 행서체로 홍문관 부제학 吳遂采(해주인)가 짓고 사헌부 대사헌 曺命敎(1687~1753년)가 전서와 함께 비문도 썼다. 말미의 '崇禎紀元後再庚午 月日立'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숙종 16년(1690)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도는 비문을 지은 오수채나 비문의 글씨를 쓴 조명교의 활동 연대와 달라 의문이다. 그래서 혹시 '숭정기원후재경오'의 '庚午'는 '丙午'의 誤植 또는 誤讀으로 보아 비의 건립을 1726년(영조 2)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碑陰의 '我聖上卽位之己巳', 곧 '우리 임금님이 즉위하신 기사년' 가운데 '기사'는 영조가 즉위한 1725년 '乙巳'의 분명한 오식 또는 오독이므로 그 같은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수채나 조명교의 활동 연대와도 맞을 뿐 아니라 비음에 적힌 '寺創施主秩'에 나오는 호조판서 李廷濟(1670~1737년)의 생물 연대와도 부합된다. 따라서『능가사사적비』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1690년이 아니라 그 보다 한 세대 가량 늦은 시기인 1726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능가사는 원래 보현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지리지류에는 별개의 사찰로 각각 기록되고 있다. 초창 시기를 신라 눌지왕 원년(416) 아도화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 시기 유물이 확인되지 않으며 고구려 스님인 아도화상의 생존 연대와도 차이가 있어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소실 폐찰됐으며, 이후 인조 22년(1644) 정현(號 碧川)대사가 하안거 중 신승견몽으로 광희대사와 함께 산 남쪽에 있는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과 요사채, 불상, 탱화, 종각, 목어각 등 불사를 일으켜 능가사를 중창하였다.


 

    정현대사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들인 민정과 의헌, 상기스님 등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문과 요사체를 세우고 단청 불사를 하여 사찰 면모를 일신하였다. 중창 불사가 이루어지자 1688년 革鞭石 한 뒤 1689년 봄 스님들께서 오수채에게 글 지어줄 것을 청하여 그 이듬해 즉, 1690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음기는 31행 80자인데 서문과 함께 寺璡施主秩, 前脚秩, 碑銘施主秩, 綠化秩 등을 밝히고 있다. 특히 사찰 중건에 다른 시주질은 경내 건물, 암자, 탱화, 불상, 금종 등의 화주와 별좌를 밝히고 있어 연혁과 사세, 가람 규모 파악에 도움을 준다. 음기(서문)는 숙종 15년(1689) 고흥 출신인 영해 若坦(1668~1754년)이 지은 것을 溟洲人 김사국이 썼다.


이 비를 통해 능가사는 원래 普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이 때는 소규모 암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44~1688년 사이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음기에 나타난 사찰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殿堂 : 都願堂, 大雄殿, 八相殿, 應眞堂, 靈山殿, 十王殿, 향로전, 迎請堂, 影堂, 명부전, 항적전, 신영당, 능인전, 승당, 보현전, 屹影寮, 원흥료, 語心殿, 선당, 금화전, 법운전, 청하당, 문수전, 양진당, 空柏寮, 영흥료, 관풍료, 출세료, 송월료, 도솔전, 묘적당, 汰金殿, 復鍊堂, 부도전, 환희각


 

- 門樓 : 일주문, 대루, 정문, 해탈문, 천왕문


 

- 암자 : 만경암, 비로암, 원각암, 중각암, 석문암, 수월암, 서부사암, 동부사암, 묘각암, 지장암



- 불상 : 대웅전불상, 팔상전불상, 응진당불상과 십육나한, 영산전불상, 시왕전왕상, 금강신


 

- 탱화 : 대웅전후불탱, 팔상전후불팔상탱, 응진당후불탱, 응진당중하단나한탱, 괘불삼장탱, 대제석탱, 시왕각탱



- 기타 : 대웅전 金卓依, 일주문 상장경, 염송설화판, 금종, 金袈娑靑紗長衫 비의 시주질은 嘉善 寶兼 외 99인이며 남한남단사, 경상도 곤양다솔사, 서봉사에서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首僧은 榮性, 三浦는 證琴, 持事는 慕冠이며 書記는 發雲이다.



住持는 竺善, 都監은 前僧統 선운이다. 이 밖에 刊刻, 石工, 治匠, 供養主 등을 밝히고 있다.


- 세부양식을 보면 龜跌의 머리는 용두화되었으나 목이 짧아 웅크린 모습이다. 입안에 여의주를 머금었는데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귀부 전면에는 머리를 중심으로하여 몸통 양편에『주역』에 나오는 八卦를 새긴 독특한 문양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예는 경내 대웅전 안(현 종각)의 동종에서도 표현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는 경우다.


 

- 龜甲 하단에 6각문을 상단에는 파상문을 彫出하였는데 비늘이 말려져 올라 있는 듯이 표현되었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조선후기에 세운 영암 도갑사의 도선 수미왕사비(1653년)의 귀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비의 몸돌(비신)은 화강암을 매끄럽게 갈아서 만든 것으로 별다른 조식없이 篆書, 碑題, 碑銘과 序가, 陰記가 있다. 이수는 장방향으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수 하단은 전후면에 8엽의 앙련과 운룡문, 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단은 두 마리의 용이 중앙의 여의주를 향해서 서로 안쪽을 보게 하였다. 네 귀퉁이에는 역시 용을 새기고 정면과 중앙에 오른편(向右) 측면에는 鬼面像을 조식하여 장식을 더하고 있다.(총고 360㎝, 비신고 290㎝, 폭 134㎝, 두께 42㎝, 字徑 4㎝)


 

6. 부도(浮屠)


- 경외 남쪽 300여m 팔영산에 오르는 길목에 추계당 부도(석종형)와 사영당 부도, 벽암선사 부도 등 9기의 부도가 있다. 또한 응진당 옆에 1기가 있다.

대부분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인데, 응진당 옆 팔각원당형 부도 등 3기 외에는 전부 堂號를 알 수 있어 어느 스님의 부도인지 알 수 있다.


- 당호를 보면 18세기 초 능가사 중창에 참여한 廣熙大師 碧川堂을 비롯, 香岩堂, 碧海堂, 雲峰堂, 秋溪堂, 泗影堂의 이름이 확인된다.

특히, 추계당 부도는 용뉴와 유곽, 상대, 하대를 갖춘 완전한 범종 형태를 위하고 있어 주목된다.


 

7. 원음료(圓音寮)


- 요사채로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 건물이다. 이 밖에도 객실 2체도 있다.



1. 천학리(天鶴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구천(九天), 가학(駕鶴) 두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하여 천학리(天鶴里)로 하였고, 1980.1. 16설립된 남학초등학교가 있다.
  1) 구천(九天)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천학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서쪽에 거북이 형의 샘이 많아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구천(九泉) 또는 귀천(龜泉)이라 하였으며, 일정시대 귀천(龜泉)을 漢字表記가 어려워 간편하게 구천(九泉)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절터와 서당터 : 년대 미상이나 마을 서북쪽 산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절터 아래에는 서당터가 있어 그 형태가 남아 있다.
매  봉 : 일제시대에 한해가 들면 면민들이 매봉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


범바위 : 이조시대에 범바위 상봉에서 봉화를 올렸다는 구전이다.

    2) 가학(駕鶴)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천학리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 풍수가 뒷산의 지형이 학과 같다 하였으며, 마을 양쪽 산이 학이 멍애를 메고 나르는 형태라 하여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가학이라 불러왔으며 1958년 리동행정구역 변경시 분동된 이래  변개(變改)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서당터 : 마을 북쪽에 위치한 서당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저수지가 되어 형태는 찾아 볼수가 없고 서당골이라 부른다.
  2. 장남리(莊南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굴말(屈幕, 시목( 木)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고흥군 점암면의 장남리로 하였다.
팔영산 줄기 아래 서쪽 해창만 깊숙이 위치하며 시목과 굴막의 중간에서 천학제방에 의하여 포두면과 연결된다.
    1) 장남(莊南)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물이 맑아 "白河(백하)"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 뒷산의 지형이 말의 안장과 투구봉, 노적봉, 해성봉 등이 있어 軍事陣將軍의 터로 마을이 형성되고 있으므로 군막(軍幕)이라 개칭하였다가 일정행정오기로 한때 굴막(屈幕)으로 불리어왔으나 그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시 청장년육성에 뜻을 두고 장남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시목(木)마을

      가. 地名由來

마을 뒷산인 지형이 돼지형이며 마을의 터는 돈목(敦睦)이라 하며 형성  당시부터 당자의 땅에서 산다는 뜻이다. 그후 1800년대 마을에 감나무가 많아 시목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永幕濟(영막제) : 마을 서편에 있는 경주이씨의 제각이다.
    3) 옥천(玉泉)마을

      가. 地名由來

장현용(張現龍)이 살면서 시목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앞이 간척지 공사로 답으로 조성되면서 가옥이 늘어남에 따라 해방후 1976년 점암면 9대 면장인 신윤식씨가 시목과 분리 마을이름을 옥천이라 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이 마을은 1963년전 마을앞이 바다였으나, 1963년도부터 해창만간척지 공사가 시작되여 현재는 바다가 없는 마을앞이 평야가 됐다.
  3. 강산리(江山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곡강(曲江), 오산(烏山) 두 마을을 합하여 1914년 이후 행정구역 개편시에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하여 고흥군 점암면의 강산리(江山里)로 하였다.

팔영산(八影山) 북쪽 해안에 위치하여 여순(麗順)반란사건과 6.25사변시 공비잔당들이 팔영산에 은거하여 피해가 많앗다. 이곳에 강산폭포가 있고 1971.3.2에 설립된 강산초등학교가 있다.
    1) 곡강(曲江)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강산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앞이 바다로서 浦口로 형성되여 일명"갈개"라고 불리어오다가 마을앞 강이 구비돌아 흐른다는 뜻으로 유래되여 곡강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백일장(百日場)터 : 마을 남쪽에 위치한 강산폭포 아래에서 활쏘는 터가 있으며 조선조시대에 이곳에서 백일장을 열었다는 터가 남아 있다.
    2) 신흥(新興)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곡강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앞이 바다인데(지금은 간척지 공사로 평야가 됨) 마을이 포구(浦口)로 형성되여 古今浦(일명:고부개)라 불리어 오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시 곡강마을 서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하여 신흥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독다리(돌다리) : 마을 남쪽에 위치한 다리(길이 4m, 넓이 3m)로서 돌 하나로 다리를 놓았다하여 독다리라고 이름했다.
    3) 오산(烏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강산에서 분동(分洞)마을로서 당초 마을명을 "까막제"라고 불러왔는데 까마귀산이 있고 그곳에 고개(재)가 있으므로 까막재라 하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까마귀산으로 한자로 표기하여 오산(烏山)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여호리(呂湖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마을의 지형이 여(呂)자 형으로 생겼고, 풍수지리상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의 지형이므로 여도(呂島), 방내(芳內)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고흥군 점암면의 여호리(呂湖里)로 하였다.

바다건너 과제방축조사업이 활발하여 북쪽의 계도(溪島), 우모도(牛毛島)를 연결하는 제방과 남쪽의 명주도(明珠島), 강산리(江山里)를 연결하는 제방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특히, 여도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보성군에 속한 여도진이 설치되어 수군만호 (水軍萬戶)가 있어 중선 6척, 맹선 12척과 조사 1,012명, 뱃사공 19명을 거느렸고 후에는 점암면 금사리에 설치된 전라좌수영 사도진첨절제사(蛇渡鎭僉節制使)의 관할에 속한 요충지였다.

영조때의 기록에는 흥양현 동쪽 59리에 있고, 성의  주위가 1,10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4이고 남문과 북문이 있었으며 여도진지도의 기록에는 성의 넓이가 동서 10리, 남북 7리에 전선(戰線) 1척(탑승  防軍) 810명이었으며 성밑 거리에는 민가가 166호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현재의 마을보다 규모가 훨씬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역면 원주도가 여도만호진에 속하였으며 이곳에서 사도까지는 육로 20리이고, 전라좌수영까지는 육로 180리, 수로 100리라고 하였다.
여호리 150번지의 오목하게 파인곳이 당시의 선소(船所)로서 굴강터의 흔적으로 추측된다. 마을에 여도만호의 선정불망비(善政不忘碑) 4기가 있고 1970. 3. 1에 설립된 여주초등학교가 있다.
    1) 여호(呂湖)마을

      가. 地名由來

마을의 지형이 여(呂)자형으로 생겼고 반도(半島)에 위치하므로 풍수지리상 연화부수(蓮花浮水)라 하여 마치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것에 비유하여 여도(呂島)라 불러 오다가 1914년대에 마을이름을 여호(呂湖)라 개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우모도(牛毛島) : 섬의 지형이 소꼬리 털에 해당된다는 뜻에서 우모도(牛毛島)라 하며, 지금은 제방으로 인하여 닭섬과 함께 육지로 연결됐다.
    2) 방내(芳內)마을

      가. 地名由來

마을앞에 있는 산이 바가지(박)와 같이 생겼으므로 박내라고 부르다가 그 박의 향기로 둘러쌓인 마을이라는 뜻에서 음차하여 방내(防內)라 한다.
      나. 特記事項

군막(軍幕) 및 깃대방 : 마을 동쪽으로 1㎞ 떨어진 지점에 선조 1592년 임란때 수천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으로 군막(일면 굴막)이라 하였으며 군막과 연결된 높은 곳(해발 200m 높이)에 국기를 세웠던 국기대 받침이 지금도 남아 있어 이곳을 "깃대방 꼭대기"라고 부른다.
신선봉(神仙峰) : 마을 앞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하는데 산봉우리에서 옛날 신선이 놀았다는 신선봉(神仙峰)이 있다.
  5. 화계리(花鷄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화전(花田), 당치(堂峙)등의 여러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고흥군 점암면의 화계리(花鷄里)로 하였다.
점암면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과역면과 접하며 김녕김(金寧金)씨의 성이 많다.
이곳에 1939. 4 .19분교로 설립되어 1943년에 승격한 화계초등학교가 있다.
    1) 화전(花田)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화계리(花鷄里)에 속하며 마을의 뒷산이 연화산(峰)(連和山)이므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어 당초에는 화계리(花鷄里)라 불리어 오다가 1914년 일제초기에 행정구역개편 당시 마을이 연꽃밭(섶밭)이라는 뜻에서 화전(花田)으로 개칭하여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장군바위 : 마을 동쪽에 있는데 조선조때 정박할 때 장군들이 이곳에 은거한 장군바위가 있다.
瓦野谷(와야곡) : 마을 동쪽 산골짜기에서 기와를 구워 생산했다.
    2) 예동(禮洞)마을

      가. 地名由來

옛날 배가 닿는 곳에서 고개를 넘는 지점에 마을이 형성됐다하여 마을 이름을 한때 "배월금"이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앞에 대룡나무가 많아 대룡나무의 꽃을 비유하여 예동이라 하였으나,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화계리에서 분리되면서 예의를 숭상하는 뜻으로 예동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벼늘터 : 가을에 추수하여 벼를 쌓아 놓는 곳이라 하여 벼늘터라 한다.
    3) 신전(新田)마을

      가. 地名由來

1952년에 신전저수지가 방조되면서부터 아랫동네가 살기좋은 곳이라하여 새점이 신점으로 다시 신점으로 다시 신전마을로 일구었다하여 개칭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터    골 : 소지명인 터굴서는 7호까지 거주하였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아랫동네로 이가하여 현재는 일호도 없음.
아랫동네 : 1952년 신전제가 방조되면서 홍수위험으로 안전지대인 위머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음.
뉘 머 리 : 웃동네는 처음 5호밖에 없었으나, 저수지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은 중앙지가 뉘머리가 되면서 살고 있음.
    4) 당치(堂峙)마을

      가. 地名由來

본래는 점암면 沙洞里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뒷산의 지형이 돼지형이며 마을의 터는 돼지 구유형으로 되어 잇고 산허리 지점에 당이 있어 마을명을 당치라 불리어 왔는데 1914년 일제초기에 행정구역개편시 점암면 화계리 당치로 이전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당치(堂峙) : 마을 뒷산 고개에 당이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액운을 쫓는다하여 돌을 던져 쌓인 돌무덕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도로확장공사로 흔적을 볼 수가 없다.
  6. 성기리(聖基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성주(聖柱), 두지(斗地), 한산(閑山)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이후 행정구역 폐합시에 고흥군 점암면의 성기로 하였다.

강산리, 양사리와 함께 팔영산 아랫마을로 북쪽에 위치하며 유명한 능가사가 있고, 이곳에 조선시대 점암면의 사창(社倉)이 있었으며 석도(石刀)가 발굴되었다.
    1) 성주(聖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기리에 속하며 옛날 마을뒤에 성주골 샘이라는 우물이 있고 마을이 팔영산(八影山) 모이봉(茅二峰)과 상접하므로 한 때 성주동(聖主洞)이라  하였으나, 성주는 성상을 뜻하는데 村名에 붙이는 것은 성상을 모독한다하여 성주로 개칭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두지(斗地)마을

      가. 地名由來

본래 성기리에서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분동된 마을로서 조선조시대에 점암면의 사창(社倉)이 있던 곳인데 쌀을 말(斗)로 되어서 출하하였다하여 마을명을 두지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평촌(平村)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주동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뒤에 봉바위가 있어 한때 "봉암"이라 불리어 왔으나 능가사 앞들이 평지로 조성됨에 따라 1956년 리동행정구역 변경시 평촌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한산(閑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기리에 속하며 마을 뒷산에 童子峰이 잇어 마을명을 "동자동(童子洞)"이라 하였고 또 옛날 이곳에 인근지역의 시장이 열렸으므로 "장터거리"라 불리아 왔으나 1914년 일제초기에 행정구역개폐시 마을뒷산의 이름이 한산(閑山)이므로 산명을 따서 한산이라 개칭한 후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율촌(栗村) : 마을내에 밤나무가 많아 설촌당시 율촌이라 불렀다.
    5) 한동(閑洞)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기리에 속하며 마을 뒷산에 한산동(閑山洞)이라 부르다가 마을 옆에 시장이 열렸으므로 "장터거리"라 불리어 왔으나 일제말에 다시 동자동(童子洞)으로 분리되었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시 한동으로 개칭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7. 모룡리(茅龍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모동(茅洞), 회룡(回龍)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모동, 회룡 두마을의 앞뒷글자를 합하여 고흥군 점암면의  모룡리라 하였다.

점암면 소재지로 1918년에 용두리(龍頭里)에서 면 소재지를 이곳으로 옮기고 옛 사도진영의 객사(客舍)를 헐어 면사무소로 개축하였다.

김녕김(金寧金)씨가 많으며, 1971. 1. 15에 설립된 고흥점암중학교와 1930. 5. 29 초등학교로 성기리에서 설립된 보통학교가 1938년에 면 소재지로 옮긴 점암초등학교가 있다.
    1) 상촌(上村)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모룡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북쪽의 靑龍嶝(龍山뒷산)이 돌아다 본다하여 설촌시부터 "회룡동(回龍洞)"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폐합시 모룡리로 합병되었으나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룡리의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촌으로 분동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당  재 : 마을 남쪽에 있는 고개로 임진왜란 이후 무기대용으로 돌을 고개등에 비축한 것이 돌로 쌓인 담으로 변하여 당재라 부른다.
장군지(將軍池) : 마을 북쪽 구 보건소 아래 못이 있어 옛날 장군이 그물을 마시었다하여 장군지라 했는데 경리정리로 없어졌다.
    2) 용산(龍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모룡리에 속한 마을로서 모룡리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릿� 또는 하촌(下村)이라 불리어 왔으며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회룡고조이라하여 마을명을 "面龍洞(면용동)"으로 부르다가 마을뒤에 용산이 있어 1959년 리동행정구역 변경시 용산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느티나무 : 약 310년전 入鄕組(입향조)가 심은 느티나무가 마을회관 옆에 있다.
    3) 회계(回溪)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面龍洞(면용동)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입구에 바위로 만든 다리가 있어 "바구다리"라고 불렀으며 마을의 산세가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이므로 面龍洞(면용동)이라 하였으나 1914년 일제초기 행정구역 폐합시 시냇가의 맑은 물이 마을을 곱게 둘러쌓여 흐른다는 뜻으로 회계라 개칭하고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장성거리 : 마을 남쪽에 있는 고개인데 그곳 지형이 중의 장삼과 같이 생겼다하여 장성거리 또는 그 곳에 장성이 있었다하여 장성거리라고 하였다.
까 치 골 : 마을 남쪽의 산골짜기 끝에 까치가 살았다하여 부르고 있다.
    4) 모동(茅洞)마을

      가. 地名由來

지형이 관복의 띠와 같다고 해서 띠골이라고 했으나, 외정때 띠자를 잘못해석 풀의 띠로 해석 띠모라고 하여 띠골 즉 모동이라고 하였다.
      나. 特記事項

마을 앞산에 중바위가 우뚝솟아 있는데 지금부터 약 40년전 마을 어른들께서 힘을 겨루기 위해 중바위 머리를 밀어 약 200m 산 아래로 굴러 내렸다.그 후 마을이 흉난이 겹쳐 다시 중머리를 올린 후 별다른 사고없이 마을이 평화로웠다는 전설이 있다.
노점동 ; 옛 선인들이 살면서 옹기굽던 터로 그 흔적과 집터가 남아 있다.
  8. 대룡리(大龍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대촌(大村), 오리(梧里), 용두(龍頭)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대촌과 용두의 머릿자를 합하여 대룡리(大龍里)로 하였다.1918년까지 점암면사무소가 있었으며 1920년대에 설치된 점암파출소가 있고  고령신(高靈申)씨의 성이 많다.
    1) 대춘(大春)마을

      가. 地名由來

2009/08/16 23:07 2009/08/1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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